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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프리드 > 은월 >< 프리드
악몽 나오고, 기분 나쁜 묘사가 있습니다.
은월 롤링 진짜 대박 대박 대박 주의하세요.
공미포 28491 자
몽매지간
몽매지간.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동안이라는 뜻으로,사물(事物)을 좀처럼 잊지 못함이나 이룰 수 없는 일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沒頭)함을 이르는 말.
은월은 요새 자주 꿈을 꾸었다. 그저께인가 바닥에 쌓여 녹아가던 눈들이 벽지에 치덕치덕 발린듯 그 꿈은 희고, 또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무작정 걷다보면 검은색 선에 다다르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간에 그는 그 곳에 다다르게 되어있었다. 그가 그 선을 한 발자국 넘는 순간, 꿈은 항상 어둠으로 재빠르게 물들어갔다. 그 어느 석양보다도, 별무리보다도, 땅거미보다도 빠르게. 은월은 자신도 모르게 항상 숨을 들이킨다. 분명히 몇 번이고 봤던 장면임에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은월은 항상 숨을 들이키게 되어있었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이 끝나고 나면 은월은 또 다시 그 어두운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산소가 희박해진다. 은월은 숨을 쉬기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제 목을 덮고 있던 두터운 목폴라를 손으로 몇 번 접어 내린다. 한결 나아졌지만 숨은 여전히 쉬기가 어려웠다. 목 바깥쪽에서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렇게 끝난다.
그 꿈을 꾸고 나면 은월의 기분은 한층 우중충해졌다. 한숨을 내쉬며 한겨울임에도 땀에 젖어 축축한 옷가지들을 벗어 내팽겨친다. 인상을 한뜩 찌푸리며 욕실로 향해 물로 몸을 적신다. 긴 머리를 끌어올려 손목에 있던 가죽끈으로 대충 묶은 뒤, 몸에 거품칠을 하곤 물로 거품을 닦아내었다. 행위가 끝난 뒤엔 으레 그가 그러하듯 거울을 통해 나체의 자신을 바라본다. 목 쪽에, 손자국이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분명하게 멍 같은 것들이 왼쪽에 네 개, 오른쪽에 네 개, 가운데에 교차된 것 두 개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들어 그 흔적들을 꾹 눌렀다. 멍을 눌렀을 때 느끼는 그 묵직한 통증이 바로 전해져왔다. 은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은월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었다. 미쳤구나. 혹은, 저주인가? 따위의 생각이 은월의 머릿속을 잠식해갔다. 욕실에서 가만히 거울을 쳐다보고 있어도 변할게 하등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 은월이 수건을 거칠게 잡아들곤 방 밖을 향했다.
"뻔하네. 악몽아냐? 그렇다고해서 악몽이 현실의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얘기지만... 그런데 왜? 형씨에게 들어온 새로운 의뢰야?"
"아......응. 고마워. 다음에 와서 뭐 좀 먹고 갈게."
의뢰라는 물음에 잠시 대답을 주저하던 은월이 목덜미를 한 손으로 훔치곤 대답했다. 거짓말은 익숙했지만, 역시 좋은 이에게 하는 거짓말은 경우가 나빴다.
"음. 도움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오컬트 쪽 관련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 여기 주소. 가기 하루 전 쯤에 연락하고 가면 될거야."
예상치도 못한 소득에 은월이 토끼눈을 떴다. 안그래도 정보가 0에 수렴하는 마당에 도움이 되지 않을 정보란 없었다. 오컬트쪽 관련이라지만 범위가 상당히 넓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거라는 생각은 일치감치 버려야했다. 정보를 건내준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가게를 헐레벌떡 빠져나왔다. 일단은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했다. 악몽은 과거의 일로 내성이 생긴듯 크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 꿈으로 인해서 상해를 입는다는 것은 불쾌했다. 상해가 없더라도 일단 그 꿈은 끈적끈적하고, 무언가가 자신을 발끝서부터 목 끝까지 옭아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른 것처럼. 은월이 습관적으로 목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계속해서 만져대는 통에 부스럼이 생긴 듯 했다.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손 끝으로 목을 한 번 긁었다. 끝인가. 더 이상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거야. 집에 가자. 은월이 한숨을 쉬었다.
코 끝에 맴도는 달짝지근 향이 봄이 온 것을 알렸다. 은월이 눈을 감고 코를 킁킁대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향기가 어느새 집 안까지 들어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인상을 작게 찌푸리곤 창문가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손을 도로 때었다. 창문을 열었다가는 더 들어올지도 몰라. 은월이 숨을 작게 헛삼키곤 아까까지 자신이 쓰고 있던 일기장을 한 번 쓰다듬었다. 하도 바꾸지 않아서 오돌토돌 다 일어난 가죽이 그간의 시간을 알려주는 듯 했다. 은월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께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악취가 집 안 온 곳곳에 풍기고 있다.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와 함께, 알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꽃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진퇴양난. 은월이 향에 대한 신경을 끄려 최대한 자신의 눈 아래에 있는 일기장을 향해 신경을 집중했다. 이상하게 종이와 잉크가 분리되는 것 같았다. 잉크가 점점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누군가 보면 의문점을 던질 성 싶은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밀려오는 수마를 밀어내려 은월이 눈을 한 번 찡그렸다. 자신이 지금 졸린건지 집중이 안되는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따뜻한 집안의 공기가 자신의 몸을 노곤노곤하게 풀어주는 듯 했다. 눈이 한 껏 시려워지더니, 이내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은월의 고개가 점점 땅으로 숙여졌다. 어느새 은월의 이마가 탁자에 닿았다.
또. 은월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자신은 어제의 그 장소에 와 있었다. 작게 입술을 짓씹곤 은월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걸어가봤자 있는 것은 그 찝찝한 어둠뿐이고, 그럴거면 갈 필요가 없지. 지금까지는 무언가에 이끌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장소로 가게 되었었지만 이렇게 초장부터 갈 의사가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뭔가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자신이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꿈은 끝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꿈 속에서 뭘 생각해도 바뀌는 것이 하등 없다는 걸 안다면 그게 무슨 자각몽이야? 한 손으로 턱을 괴곤 은월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 흰 세상 속에서도 산뜻한 어둠이 밀려들어왔다.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은월이 눈을 떴다. 성큼, 기분나쁜 것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은월이 숨을 들이킨다. 30초도 안 지났을 터인데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온 어둠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어. 허벅지에 힘이 안 들어가. 은월이 손으로 땅을 짚었다. 식은땀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자신의 발목에 무언가의 묵직하고, 서늘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잡아끌어당겨졌다.
꿈이 바뀌었다. 은월이 찌푸려진 미간 사이를 손으로 한 번 풀었다. 책상에서 잤던건가. 은월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손을 목덜미로 가져다대었다. 목덜미를 한 번 긁어내니 손톱에 피딱지가 껴 있었다. 몸에 일순 소름이 일었다. 은월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자신의 손톱을 쳐다보았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욕실화도 신지 않고 맨발로 들어간 은월이 거울을 쳐다보며 긴 고동색 머리를 성급하게 한 손으로 치켜 올렸다. 허, 은월이 더도말고 딱 그 정도의 헛웃음을 내뱉었다. 목덜미 한 켠은 피딱지가, 목에 흐릿하게 새겨졌었던 멍자국이 보다 짙게 남아있었다. 목덜미에 남아있는 피딱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좆같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안위보단 짜증이 솟구쳤다.
샤워기의 물을 켰다. 따뜻한 물이 퍼져나옴과 동시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순백색의 하얀 욕조에 찰박찰박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온수가 딱 욕조의 절반만큼 채워졌을 때 은월이 집안에서 얕게 입고 있었던 옷가지들을 벗어냈다. 사락거리며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꿈치나 발끝으로 온도를 재보기도 전에 은월이 무작정 몸을 욕조 안으로 들이밀었다. 따뜻하기보단 뜨거운 물이 온 몸을 파고들었다. 춥게 식었던 몸에 뜨거운 물이 갑작스럽게 닿으니 그가 몸을 움츠렸다. 다리를 반쯤 접고 앉아있으니 자신의 몸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흉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릴 적 처음 흉터가 생겼을 땐 흉터가 생긴지도 몰랐더랬다. 그 때는 먹고 살기에 바빴고, 남들또한 어린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터였다. 이젠 어느 흉터가 언제 생긴 건지도 몰랐다. 가끔 기억나는 것들은 정말 큰 상처들. 검은 마법사와의 격전 때 입은 옆구리의 부상이라던가, 데미안에게 받았던 허벅지의 상처정도가 그나마 드문드문하게 기억나는 것들이었다. 다리를 펴 일직선으로 만드니, 보이지 않았던 무릎 아래의 흉터도 보였다. 누가 자신의 몸을 본다면 흉하다고 할 것이 뻔하였으나 은월 자신은 그것에 대해 그렇게 큰 무게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누가 흉터투성이라며 자신의 몸을 욕한다면 그저 그 잘난 면상에 주먹을 한 번 내꽂아주고 갈 정도의 얕은 문제였다. 종아리는 꽤나 단단한 부츠 때문에 흉터가 많이 남지 않았다. 많이 남은 건...발목정도겠지. 힘줄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위라 발목을 노리고 공격하는 이들이 많았다. 부러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베이기도 했었다. 은월이 눈길을 돌려 자신의 발목으로 향했다. 이상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흉터인가?"
-흉터 아닌데.
은월이 다리를 접어 자신의 손을 발목께로 가져다대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혼잣말에 답이라도 해주듯 텅 빈 욕실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드디어 자신이 귀신에 씌이기라도 했나보다. 은월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정말로 귀신에 씌이기 전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성 싶었다. 1평 남짓한 욕실에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그 사실에 숨을 헛들이킨 은월이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되먹지도 않은 꿈을 족히 열 댓 시간은 꾸었더니만 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책상 위에서 잤던터라 어깨죽지가 아릿하게 저려왔다. 정신또한 절대 맑다고 하지 못할 상태였다. 그래도 욕실을 나서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햇빛에 은월이 작게 미소지었다. 자신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광활한 천공 속 솟아오른 태양을 보자하면 자신의 연인이었던 자가 떠올랐다. 향수가 절로 온 몸에 돋아내렸다. 언젠가 자신을 맞이했던 따스한 햇빛과, 기분 좋은 시끄러움 속 가운데 위치했던 둘만의 고요한 시간. 아마도 두 번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은월은 그 사람과의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믿었다. 멍하니 욕실에서 나와 햇빛을 쳐다보고 있던 은월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반팔 티 하나 입었다고 온 몸 깊숙이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추위에 은월이 몸을 한 번 크게 떨었다. 불을 더 지펴야할 듯 싶었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에 대충 주변에 있던 나무도막 덩어리를 던져주었다. 며칠 전만 해도 두둑이 쌓여있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두, 세 덩어리밖에 남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야겠군.그는 이 곳에 와서 살기 시작한 이후론 마을과 조금 동떨어진 집의 위치 때문에 식료품을 제외하곤 거의 다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그의 친우가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자연인이다, 뭐 이런거냐?' 라며 한껏 비웃었기는 했지만... 은월은 그를 살포시 무시했었다. 언뜻 보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자급자족하고 있는 생활이었지만 은월은 그런 자신의 삶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사는 게 너무 쉬우면 감성에 젖을 시간이 많아진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얻은 교훈이었다. 은월이 집 안으로 들어서 나무문 바로 앞쪽에 위치한 도끼를 집어들었다. 애초에 첩첩산중에 위치한 집이라 나무는 질릴 정도로 많았다. 대충 아무거나 패서 갖다두면 되겠지? 굳은 살 박힌 손에 자연스럽게 감기는 도끼가 이상하게 자연스러워 은월이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도끼로 뭔가를 죽였던 적이 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랬던 기억은 없었다. 별 쓸모없는 생각을 했다는 듯이 은월이 고개를 좌우로 세게 한 번 젓고는 밖을 향했다.
은월이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는 눈에 젖은 나무도막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젠장. 은월이 욕짓거리를 한 번 씹었다. 기껏 팼던 나무도막들이 눈에 다 젖어버린 탓이었다. 자신의 무릎께까지 오는 도끼를 세워 은월이 손을 올리곤 몸을 숙여 가팔라진 호흡을 갈무리했다. 이상하게 체력이 떨어진 듯 싶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오른쪽 위쪽에 위치한 나무도막들을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곤 기지개를 켜 굳어있던 근육들을 풀어주었다. 뼈가 맞춰지며 비명을 질러대었다. 나무도막이 쌓아져 있는 곳으로 가 그것들을 들어올리니 치골 쪽 허리 부근이 저릿하게 찔러왔다. 은월이 숨을 한 번 내쉬곤 다시끔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갔다.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숲으로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많이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번에 패놨던 장작들이 수 일만에 사라진 것을 보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다보니 이렇게 된 셈이다.
어느새 집 문 앞에 도착한 은월이 문을 한 쪽 팔로 밀었다. 두 손으로 장작들을 받치고 있었기에 남는 손이 없었다. 첩첩산중이기도 하고, 집에 딱히 귀중품을 놔두는 사람도 아니어서 도둑이 들 염려도 없었다. 결국엔 문을 안 잠그고 다니는 것이 습관화되어 이제는 키를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불편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따뜻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눈에 젖어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장작들을 모닥불 옆에다 쌓아두었다. 내일이면 완벽하게 마를 듯 싶어 은월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문 앞에 내버려둔 도끼를 찾으러 은월이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그가 발을 밖으로 내딛자마자 서슬퍼런 날이 잔뜩 서 있는 도끼가 문 앞에 주인을 잃어버린 개처럼 처량하게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봤다면 필시 잔소리를 했을 터. 어느새 떠오른 프리드의 생각에 은월이 작게 웃음을 흘리곤 도끼를 들었다. 다시끔 문을 여니 아까완 달리 문의 경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기름칠도 다시 해야겠군. 적적했던 아침과는 달리 일이 있다 못해 넘치는 낮이었다. 도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면에 기댔다. 그대로 집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은월을 뒤로하고 현관에 있던 흰색의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종이를 집어든 은월이 그 내용을 확인하자 그의 얼굴이 그가 들어있던 종이와 비슷한 색으로 희게 질렸다. 어제 받아들었던 그 용하다는 사람의 연락처였다.
어제 집에 오자마자 연락했으니 아마 메일함에 답신이 와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은월이 메일함을 확인하자마자 봇물 터지듯 울리는 알람에 은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메일로 연락하기 싫다니까.. 애초에 남과 인연을 잘 맺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성격 탓에 그가 메일함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와서 얘기하라는 말을 해도 자꾸만 메일로 보내니 이젠 은월 그 자신도 중요한 일이건 뭐건 포기한지 오래였다. 은월이 메일 정렬을 최신순으로 바꾸니, 위에서 두 번째가 바로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연락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입술을 앙 다물고 오랜만에 긴장감이 맴도는 마음가짐으로 메일을 눌렀건만 그런 그의 행동과는 다르게 메일 속에서 특별히 별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헤네시스 공원에서 4시까지 만나자는, 핵심만 있는 메일이었다. 이런 비지니스적 관계에서 정은 오히려 해가 되었기 때문에 은월은 이런 쪽에선 오히려 사무적인 메일을 더 좋아했다. 알아보기 쉽고, 더 편했다. 4시가 되기 까지는 2시간정도가 남아있었다. 집에서 헤네시스까지는 40분정도면 도착하니 천천히 준비해도 될 성 싶었다.
책상에 정갈하게 놓여진 일기장을 들어 뒤쪽에 메모 부분을 펼쳤다.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하는 등의 문학적 부분은 전혀 자신과 맞지 않았다. 다만 이것도 프리드와 함께 생활하면서 익히고, 이내 습관이 되어버린 것들 중 하나였다. 자신의 삶 속에 프리드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건 단 하나도 없었으므로. 자신이 일기를 그만쓴다던가 하는 날은 아마 필시 오지 않을 터였다. 이름조차 자신의 부모나 친척이 아닌 프리드가 지어준 것이었으니까. 은월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옆에 놓여진 펜을 들곤 그를 만나면 말할 것들을 하나씩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언제 그 꿈을 처음 꾸었나.
3개월 전?
은월이 자신이 직접 쓴 답을 보고도 현실성이 없는듯 조소를 흘렸다. 3개월동안 그 꿈을 꿨다니.. 자신의 체력이 떨어질 만 했다.
어느 쪽에, 언제 상처가 생겼나.
목과 발목. 비교적 최근.
그가 답을 적음과 동시에 무심코 종이를 지지하고 있던 왼쪽 손을 올려 목덜미 께로 가져다대었다. 피딱지까지 생겼으니 더욱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밴드라도 붙이고 가야하나. 은월이 입술을 작게 짓씹었다. 등골이 소연했다. 그가 고개를 툭 떨구곤 숨을 크게 들이마쉬었다. 씨발 진짜..
-씨발 진짜? 왜, 내가 싫어?
은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은월. 내가 서운하잖아.
-...내가 준 이름은 어디갔어.
은월이 미간을 한껏 구겼다. 귀신이든 악몽이든...다른 누구도 아닌 프리드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는 도가 지나쳤다. 루시드의 장난일지도 몰랐지만, 으레 그래왔듯 그녀의 장난은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면 지쳐나가는 쪽은 그 쪽이었으므로.
-말 안 할거야?
힘껏 감은 눈 앞에 프리드의 모습이 일렁이며 나타나는 듯 했다. 마침내 완성된 프리드의 모습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의, 예의 그 모습이었다. 찌푸려진 미간을 풀고 눈을 한 번 들어올리니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먹을듯이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포식자가 자신의 먹잇감을 노리는 시선이었다. 전쟁통에서 살아왔던 터라 이런 시선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시선은 최근 들어 오랜만이었다. 은월이 다시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아찔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었던 그 때와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 했다. 그가 눈을 힘껏 감음과 동시에 또 다시 눈 앞에 프리드의 모습이 일렁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흑발의 그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에반의 형인 유타를 닮았다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그 모습에 은월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언뜻 검은 마법사가 생각나는, 기분 나쁜 색이었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프리드가 눈을 떴다. 전쟁 통 속에서 질리도록 봐 왔던 피처럼 붉디 붉은 눈동자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릿한 웃음을 지은 듯 했다. 은월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떴다.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로 흘러내렸다. 맙소사. 은월이 실성한듯 웃음을 흘려대었다.
"아, 잠시만요. 다시 한 번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은월의 앞에 앉은 사제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쪽에 능통한 사람이길래 무당이나 그 쪽 사람인 줄 알았건만, 그냥 시간의 신전에서 일하고 있던 사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키진 않지만 따로 연합쪽에 연락했지. 은월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웃어넘겼다. 허탕이군.
"지금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까요?"
은월의 말에 사제의 눈이 가늘게 치켜떠졌다. 로브에 가려 반쯤 보이지 않았지만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은월이 시선을 한 쪽으로 흘리며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이내 사제가 앙 다물었던 입술을 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영 내키지 않아하시는 것 같으니 그냥 가셔도 괜찮습니다. 기껏 시간 내줘서 와줬더니만...... 뭐, 지금 댁 뒤에 뭐가 있긴 한데, 악령은 아니고 아마 수호령과 비슷한 개념인 것 같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딱히 걱정하실 건 없으신데...... 유령이 아니고 정신계 공격에 지배당하시거나 그런건 아니십니까?"
일어나려는 은월을 목전에 두고 사제가 조용히 읊조렸다. 한적한 헤네시스 공원의 가장 안쪽에서 그런 얘기를 하니, 마치 넓디 넓은 회랑의 한 사제가 고요히 무언가를 읊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그럴...일은 없을 겁니다. 루시드 이외에 이런 수준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었나요? 루시드에게서 일찍이 정신계 공격을 수시로 받아온 그로서는 이 악몽이 그 쪽 공격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은월이 떨어진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가져다 붙혔다. 달라진 사내의 태도에 사제가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긴, 그렇지요. 아무튼 분명한건 지금 그 악몽은 그런......당신이 생각하시는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는겁니다. 정 불안하시다면 연합에게 연락해드릴까요? 영웅님이시기도 하니 연합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이실겁니다."
"아..아뇨, 괜찮습니, ..."
사제의 제안에 은월이 하던 말을 멈추고 사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은월의 흐려졌던 동공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내가 검은 마법사의 토벌전에 합류했던 인물이란 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은월은 사제와의 대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연락을 줬던 사람이라고만 얘기했지, 한사코 검은 마법사에 관련된 것을 언급했던 적은 없었다. 경계태세를 갖춘 은월이 당장이라도 사제를 공격하기라도 할듯 그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날 서린 너클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 여차하면 손으로 그 너클을 당장 뽑아서 그의 얼굴 한 가운데에 명예 어린 흉터를 남겨줄 생각이었다. 그런 그를 미래에서 보고 오기라도 했는지 사제가 은월을 쳐다보다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려 더 히죽, 웃었다.
"이런, 진정하세요. 전 단순히 이런 부류에 능통한 사람일 뿐이랍니다. 이 때문에 연합에서도 가끔 지원하러 가기도 하고요. 연합에 속해있고, 또 자주 드나드는 제가 당신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 않습니까?"
"..."
"아, 물론 당신은 검은 마법사의 토벌전이 끝나자마자 종적을 감춰버리셔서 알고 계신 분들은 당시 토벌전에 참여했던 병사들과 내부 관계자들밖에 없지만요."
깔끔한 대답이었다. 미리 할 말을 대본에 써 둔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내뱉는 사제의 모습에 은월이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이 자를 공격해봤자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허리춤에 찼던 너클에 가까이 가져대었던 오른손을 다시 흰색의 글로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사제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그럼, 일단 연합에 당분간 당신이 머물게 되었다고 전달하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아니,"
은월의 말을 가로막곤 사제가 말을 계속했다.
"동료분들은 오히려 더 좋아하실거예요. 어차피 당신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오히려 더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요?"
퍽이나 걱정하겠군. 은월이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서로서로가 충분히 메이플월드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접은지는 모두가 오래되었다. 하긴, 몇 번씩 세간이나 연합 공식석상에서 얼굴을 비친 적이 있지만 자신은 아니었던가. 하지만 오히려 그런 쪽에서 얼굴을 드러낸다는 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성 싶어 은월이 고개를 한 번 휘저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신의 눈 앞에서 조잘조잘 입을 나불대고 있는 사내가 의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그란디스에서 제른 다르모어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던데...이 사내도 그 추종자일지 몰랐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일단 연합에 방금 메일로 연락은 해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쯤에 연합에서 배웅하러 집 앞으로 나와있을 거예요."
"..."
사제의 말에 은월이 표정을 굳혔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사제가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올려 한 팔에 매었다. 의자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책상 쪽으로 밀렸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아이보리색 통 넓은 소매가 테이블을 스치고 지나가자, 사내의 꼭 쥔 손에서 바스락 거리며 종이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이내 사제가 완벽히 제 시야에서 사라지자 은월이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폈다. 사제와의 피곤한 대화로 찌뿌둥해진 몸을 한 번 풀고는, 왼쪽 손을 사내가 자리를 나서고 남긴 종이조각 쪽으로 내려 재빠르게 그 무언가를 집어내었다. 아무 감흥도 없다는 표정으로 은월이 종이조각을 제 품 안 주머니 쪽으로 집어넣었다. 내통이 있었다고는 아무도 말 못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 은월!"
자리에서 일어난 은월의 뒷편에서 에반이 달려오며 반가운 듯 활기찬 인사를 건냈다. 옆에는 예의 미르도 함께였다. 으레 그랬듯이 에반이 나타나면 주위가 복작거리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에반 혼자였다. 아, 그러고보니 검은 마법사의 절명 이후로는 연합에서 교대로 돌아가며 그 주의 순찰을 맡기고 있다고 했었나. 은월은 그와의 전투 직후 상처만 대충 치료받고는 바로 엘나스에 틀어박혔었으니 연합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 때문에 전에 나인하트에게서 드문드문 들었던 기억만으로 메이플월드의 현재 상태를 가늠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나인하트가 어떻게 자신을 놓아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웬 일이야. 순찰중?"
"네. 이번 주는 이걸로 마지막이에요! 아직 마을 주변에 흉흉한 기색을 내뿜으면서 접근해오는 몬스터들이 있으니까 이런 때야말로 더 열심히 해야죠. 벌써 반 년도 넘게 지났는데......"
은월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벌써 반 년인가... 새삼 시간의 세월이 덧없이 그에게 밀려들어왔다. 언제 소멸될까 노심초사하며 지냈던 것이 벌써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별 걱정 없이 생명만 연장하며 살고 있으니,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저를 본다면 비웃을 것이 뻔해보였다. 은월이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뻔뻔하게도. 자신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아, 맞아. 저 방금 메일로 받았는데 연합에 잠시 머무르신다면서요? 은월이야말로 웬 일이세요?"
"아..."
은월이 침을 한 번 꿀떡 삼켰다. 메일이 빠르긴 하구나. 벌써 받았을 줄이야.
"그게, 나도 연합 일 한 번 해볼까 싶어서. 부탁한 것도 있고 말야."
에반이 그의 대답에 환한 얼굴로 은월의 손을 맞잡았다. 다행이에요!
"저희도 너무 은월에게서 온 연락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 연합이 조금 바쁜 것도 아니라서 일손이 더더욱 필요한 상태였기도 하고요. 덕분에 이렇게 저도 부려먹히고 있는 중이지만... 아니, 그것보다 그러면 저희 연합에서 간간히 얼굴 볼 수 있겠네요!"
"응, 그렇지."
은월이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공원 바깥쪽을 가르키자, 에반이 알았다며 고갯짓했다. 에반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집에 갈 생각이었다. 물론 에반이랑 헤어진 뒤에는 몰래 쪽지를 읽을 속셈이었지만. 언제 그 쪽지를 읽을 수 있을지 은월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 은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반은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은월의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췄다.
"그런데, 은월 지금 어디로 가는거예요?"
"너 지금...순찰 도는 거 아니었어?"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에반이 뜸을 들이고는 은월에게 물었다. 황당한 질문이었다. 공원에서 떠나온지가 언제인데 이런 질문이라니. 은월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는 얼굴로 에반을 쳐다보았다.
"아, 네, 뭐...그렇죠. 그런데 은월이 제가 가려는 방향 쪽으로 가시길래요. 지금 집 가시는 길이세요? 저는 지금 엘리니아로 가야하는데. 여섯갈래길로 가시는 거 맞으시죠? 같이 가요."
에반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듣고 있는 사람이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속사포로 말하는 에반에, 은월은 순간 사제와 에반이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니지. 은월이 고개를 좌우로 약하게 흔들었다. 은월보다 한 걸음 앞에 선 에반이 환히 웃으며 벙찐 얼굴로 쳐다보는 은월에게 빨리 오라며 재촉하였다.
-내 후계자가 그렇게 재밌어?
머릿 속에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은월은 답하지 않았다.
"아, 응. 넌 저기로?"
"네. 순찰도 다 돌았으니 이제 에우렐에 들렸다가 연합쪽으로 다시 돌아가보려고요. 가뜩이나 아직도 흉흉한데... 몸 조심하세요, 은월. 빨리 연합으로 돌아오셨으면 좋겠네요."
"하하, 걱정하지 말래도. 잘 가. 또 보자."
은월의 대답에 에반이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반이 저 멀리 엘리니아로 다시 길을 재촉한 것을 확인하고 그의 인영이 흐릿해질 때가 되서야 은월이 몸을 돌렸다. 배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몇 분 가량이 남아있었다. 왼쪽 손을 옷깃 안쪽으로 넣어 주머니 한 켠을 더듬거렸다. 몇 번 더듬더듬 거리며 옷 안 쪽을 쑤시니 금세 부시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꼬깃꼬깃한 흰 종이가 손에 잡혔다. 그대로 종이를 옷 밖으로 꺼낸 뒤 은월이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돌려 사람이 있나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바깥에 귀문진이라도 설치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것이 더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래도 혹시. 혹시 몰라. 최근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 때문에 신경이 한껏 예민하게 돋아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은월이 근처 나무기둥 뒷편으로 숨어들었다.
쌀쌀한 겨울바람으로 새빨개진 손을 한 번 세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한 흰색 종이 위에는 연필로 급하게 휘갈긴 문구가 남아있었다.
'감시받고 있습니다. 당신이요.'
날쌘 바람 때문인지 머릿 속이 얼얼했다. 최근 들어 그 꿈을 꾼 이래로 지금까지 자신을 감시하려는 기척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한낱 사제따위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은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꿈을 꾸고 난 이후로 들리는 목소리는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정신계 공격이라기엔 그 특유의 몽롱함이 남아있지 않았다. 만약, 만약,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그 감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은월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껏 긴장하고 평화로운 척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굳어져 내려가는 듯 했다. 종이를 주먹 안에 쥐곤 구겨내었다.
"형씨, 안 탈거요?"
"..."
"형씨!"
"...아뇨. 탑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뒤로 한 채 은월이 대답했다. 정말 빨리 연합에라도 들어가야 이 속이 편해질까. 지긋지긋한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뻔뻔하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널 지워보내야할까. 너는 대체 어딨을까. 은월이 고개를 푹 떨궜다.
프리드.
오랜만에 한동안 하지 않던 뱃멀미를 했다. 속이 뒤집혀진듯 미치도록 울렁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몸상태에 은월이 입술을 짓씹었다. 엘나스에 도착하자마자 배에서 뛰어내려 으슥한 골목길의 벽에 손을 짚고는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뛰어내려오면서 분명 누군가와 부딪힌 것도 같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세상이 핑핑 돌았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세상은 360도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챗바퀴에 갇힌 애완동물같이 가만히 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니 별 감흥이 없었다. 온 몸에 열이 오른 걸지도.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옴과 동시에 몸살이라도 난 것 같았다. 헛구역질을 다 하고 났음에도 은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허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습관적으로 입술 주변께를 오른손등으로 부볐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아픈 적이라고는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척. 은월이 식은땀을 흘리는 이마를 한 번 훔치곤 멀끔한 얼굴로 걸어나왔다.
집에 도착하자 은월이 침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추위 때문에 얼굴은 얼얼했고, 손과 발은 감각이 없었다. 도저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을 기운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기는 써야했다. 은월이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리고는 터벅터벅 테이블로 걸어갔다.
-쓰지 마. 어차피...
"닥쳐."
-...과거의 부산물이잖아.
은월이 주먹을 쥐곤 원목 테이블을 내리쳤다. 화를 참고 있는 듯 그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험한 말투에 뜸을 들여 말하지 않는가 싶었더니 다시 말을 잇는 그 '목소리'에 은월의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은월이 입술을 다시 앙 다물었다. 일방적인 대화였다. 자신을 화내게 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임이 분명했다. 왼쪽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오른손으로 펜을 들어 검정색 잉크를 찍었다.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집 안에 울렸다. 몇 자 채 쓰지 못했는데 금세 잉크가 떨어져 펜 닙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은월이 굳은 얼굴로 다시 잉크통에 펜을 가져다 넣었다. 잉크를 거의 다 써 통을 기울여야만 펜 촉을 적셔주는 탓에 은월이 통을 기울였다. 오른손으로 잡은 펜을 조금 더 잉크 통 안에 넣자, 검지 손가락이 잉크 통 입구에 닿아 검정색으로 물들어갔다.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려 주변에 느러뜨려져 있을 게 뻔한 물티슈를 눈으로 좇았다. 자신의 오른쪽 뒷편 바닥에 흐트려진 옷가지처럼 버려진 물티슈를 찾자, 은월이 오른손에서 펜을 빼 잉크를 잡고 있는 왼손 약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티슈를 들고 와 테이블에 가져다 놓았다. 한동안 쓰지 않은 탓인지 물티슈의 뚜껑부분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앙 다물곤 물티슈를 열려고 애를 쓰자, 신경쓰지 않고 있던 왼손에서 잉크병이 미끄러 떨어졌다. 검정색 잉크가 수묵화처럼 갈색 재생지에 흘러넘쳐 퍼졌다. 글자들이 검정으로 뒤덮혀갔다. 은월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쓰러진 잉크병을 바로 세웠다. 이미 퍼진 잉크들은 종이 깊숙이 스며들어 몇 장을 가득 채워버렸다. 일기장이 검정으로 물들어있었다.
은월이 화장실으로 가 잉크를 치우느라 더러워진 그의 손을 비누로 씼어냈다. 빳빳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는 손목에 감겨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올려묶었다. 앞머리도 수납장 아랫칸에 있던 핀으로 고정시켰다. 이제는 뻑뻑한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 찬 물을 세게 틀었다. 물이 쏫아져 내려오자 은월이 두 손으로 물을 가득 담아 채운 뒤 자신의 얼굴께로 가져갔다. 찬 물이 얼굴을 때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의 행위를 반복한 뒤 은월이 다시 수도꼭지를 잠그곤 손을 닦아던 수건으로 물기 가득한 얼굴을 닦았다.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던 은월이 눈동자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크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월이 수건을 다시 걸곤 화장실을 나섰다. 테이블 위의 그것들은 그대로였다. 이젠 더 이상 일기장이라 부를 수도 없어진 것, 빈 잉크, 신경질적으로 뽑혀져 있는 이젠 검정빛인 물티슈들. 은월이 애써 고개를 돌리곤 침대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수마가 그를 덮쳤다.
꿈은 자비가 없었다. 시작은 희었고, 끝은 검었다. 기분 나쁜 것들이 그의 온 몸을 덮쳐왔다. 몸 가장 아래쪽까지, 몸 가장 은밀한 곳까지 눅눅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들어왔다. 만약 화형을 당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쾌한 고통에 은월이 자면서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꿈이 끝나도 은월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은 이미 깼음에도 몸은 아직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조차도 움찔 할 수 없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일어나면 몸은 훨 나아졌겟지만, 정신은 그 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할리 없을 것 같았다. 은월이 다시 잠을 청하려 정신을 집중했다. 옛전에 데미안과의 전투 이후 크게 다쳐 마취를 했었을 때 느낀 기분과 똑같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웅웅 울리고, 자신은 저 멀리 의식의 저편에서 그걸 그저 듣고만 있어야했다. 곧 있으면 깨겠지.
은월의 머리카락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상냥하다기에는 난폭하고, 난폭하다기에는 너무나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당장 깨 그 손길을 멈춰야한다는 은월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가만히 누워 숨을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참...그대로네, 너는."
목소리가 들렸다. 웅웅거리는 탓에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은월은 단박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잠들어 있음에도 온 몸이 아려왔다. 가슴께가 무언가로 차오른 것만 같았다. 은월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지만서도 마치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에 은월이 그 수백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가 아무리 변했어도, 더이상 내가 아는 그가 아니어도. 은월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외면했다.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쓰다듬던 그가 허리를 숙여 입술을 자신의 볼에 가져다대었다. 입술과 피부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기척이 사라졌다. 잊지 못하겠어. 사랑하는 걸. 그가 더 이상 내가 아는 그가 아니어도. 다만 은월이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잊어.
그리고 변한 그를 증오해.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은월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가지고 논 그 일을 완벽히 기억 속에서 잊어버린듯 은월이 기지개를 사뿐하게 폈다. 이따끔 그가 모를 표정으로 입술을 씹어대곤 했지만, 다시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은월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바로 자신의 옷가지들과 몇가지들의 생활용품들을 챙겼다. 오늘 당장 연합으로 갈 작정이었다.
저번에 사뒀던 달걀을 숟가락으로 깨 프라이를 만들어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현관 바로 앞쪽에 놓인 짐을 들고는 몇 개월동안 머물렀던 집에 안녕을 고했다. 애초에 무언가가 많이 남아있지도 않았던 집이었기에 짐도 생각보다 훨씬 단촐했다. 더 이상 불도 들어오지 않는 건물을 보니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은월이 밤새 얕게 쌓인 눈을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밟았다. 에레브까지는 멀었지만, 이번엔 나인하트가 주었던 이동스크롤을 쓸 예정이었다. 마을로 내려가 창고에 들리면 거기에 맡겨두었던 에레브 전용 이동스크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몇 번 올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몇 개 받아두라고 했던 것을 받아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희귀한 물건이니 잘 간수하라고 해서 창고에 맡겨두었더니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은월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월이 답지 않은 번거로운 차림으로 마을에 내려오니 놀란 주민들이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사가는 바람이라도 풍기는 것인지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어딜 그렇게 가냐는 소리를 들으니 머쓱해진 은월이 뒷목덜미를 지분거리며 간단히 대답을 해줬다. 그냥, 어디 좀 머물다 오려고요. 잘 지내세요.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이 아쉽다며 잘 지내라며 인사를 건냈다. 자신은 잠시 머물다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안녕인사를 고해버리니, 기분이 오묘해졌다. 정말로 이사를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하하,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조촐한 대화를 끝낸 은월이 창고에서 에레브 이동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몇 개는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서 남겨둘 작정이었다. 짐을 자신의 다리께에 기댄 뒤에 두 손으로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세상이 희어졌다.
"...어? 은월이에요?"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눈 앞에 에레브가 펼쳐졌다. 다른 쪽에선 회의라도 하는 듯 신전 내부에는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신의 표정을 살피며 토끼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를 마주보았다.
"오랜만이야, 부기."
자신의 긍정적인 대답에 부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꼬리라도 달렸다면 방방 흔들어줄듯한 모습에 은월이 오랜만에 미소를 얼굴에 만연히 띄웠다.
"정말 오셨네요! 앗, 지금은 나인하트님께서 안 계시는데 제가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응, 좋아."
입술로 호선을 그린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듯한 밝은 에너지에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 싶었다. 부기가 자신보다 앞장 서 에레브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회의장 바로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자신도 몰랐는데, 지금보니 생각보다 꽤 시설이 잘 되어있었다. 하긴 기사단장들도 쉴 곳은 필요했겠지. 여관같이 방 호수도 정해져 있었는데 은월의 것은 102호였다.
"이건 비밀인데, 호수가 빠를수록 좋은 방이래요."
열 마리의 부기가 킥킥 거리며 은월에게 속삭였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지만 102호는 2번째로 호수가 빠른 방이었기에 은월이 마음 속으로 기대를 품었다. 그런 그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102호는 부기의 말대로 정말 좋았다. 킹사이즈 침대에, 테이블, 소파. 웬만한 여관보다 좋은 시설에 은월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려 웃었다. 이렇게 호화로운 시설이 자신과 어울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대우받는 듯한 느낌에 은월의 기분이 묘하게 붕 떴다. 요 며칠만에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이럴거면 진작에 연합에 올 걸 그랬나. 은월이 방 안으로 들어서 방구석 한 켠에 짐을 내려놓고는 소파에 앉아 그저 멍하니 방을 둘러보고 있으니 부기가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뒷주머니에서 치지직 거리며 듣기 싫은 소음을 내는 무전기에 그가 화들짝 놀라 무전기를 허겁지겁 꺼내들었다. 부기가 무전기를 뒷주머니에서 꺼내 들자 치지직거리며 나인하트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방 안에 울렸다.
'은월님께서 오셨습니까?'
"앗, 네. 제가 방금 방에 안내해드렸어요."
'그렇군요. 금방 가겠습니다. 거기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무전을 받는 부기의 모습에 은월이 살풋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나인하트와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그렇다고 치지만, 몇 년을 동고동락해왔던 부기조차 어렵게 대한다니. 새삼스럽게 나인하트의 무서움이 떠올랐다. 어려울만도 하지. 무전이 끊김과 동시에 그가 몸에서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뱉었다. 직장 생활에서의 푸념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나인하트님은 요새 더 신경이 곤두서계셔요. 뭐랄까.....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거겠죠? 아직도 정리가 안된 상태니까요."
"뭐, 그렇지 않을까..."
"제가 뭐라고요?"
은월이 부기의 말에 대충 얼버무리는 사이에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인하트였다. 그와 동시에 부기의 얼굴이 어두운 흑빛으로 물들었다. 미처 내뱉지 못한 비명이 은월에게 들리는 듯 싶었다.
"아, 아니요, 나인하트님,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은월님은 어디계십니까?"
나인하트의 물음에 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를 확인한 나인하트가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은월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반 년만이었다. 검은 마법사와의 전투를 할 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분 매초 얼굴을 마주봤더니 고작 반 년이어도 이렇게 괴리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머리가 좀 더 길어진 걸까. 어딘가 바뀐 나인하트를 바라보자 나인하트가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었다. 은월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 그의 얼굴이 마치 '이렇게 바쁜 때에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오신겁니까.' 라며 추궁하는 얼굴이었지만, 은월은 애써 그 표정을 무시했다.
"사제에게 들었습니다."
나인하트가 현관으로 들어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하자,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감시당하는 것 같으시다고요. 은월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다시 한 번 더 끄덕였다. 나인하트가 눈을 내리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얘기를 나눠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인하트가 눈길을 열 마리의 부기에게로 던졌다. 부기가 웃음을 흘리며 은월에게 손을 사뿐히 흔들어 인사를 건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부기가 사라지자마자 나인하트가 현관문을 굳게 닫았다. 소파에 앉으시지요.
"에레브는 신수의 보호를 받는 공간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이라고 해도 이 곳을 침입해서 도청하는 바보같은 짓은 쉽지 않으니 편하게 하시죠."
은월이 도청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나인하트가 눈을 내리깔며 단순한 사실을 얘기하는 듯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그 사제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아니야, 됐어."
은월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악몽을 꾼다는 얘기는 더 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무조건 정신과 의사나 그보다 더한 짓들을 자신에게 해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은월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단촐한 은월에 대답에 나인하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런거라면 직접 연락하셔도 괜찮으실텐데요? 나인하트의 물음에 은월이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뭐, 됐습니다. 연락해드리죠."
나인하트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은월을 보다 혀를 한 번 찼다.
"대신, 순찰은 도세요.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요. 저희도 이렇게 광활한 대륙들을 전부 다 관리하는 건 인력이 부족합니다. 한시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있어야하는데 은월님께서 이렇게 빠지셨으니..아, 탓하는 건 아닙니다."
명백히 탓하는 의도가 가득한 나인하트의 말에 은월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말로는 아무에게도 지지 않을 듯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의 입에서 나온 수락의 말에 은월이 미소를 띄웠다. 깨어난지 꽤 됐는데도 아직까지 단 한번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도 않고 말이다. 일이 일사천리로 다 잘 풀리니 좋지 못할 것이 어디있으랴, 지금은 무슨 소리에도 미소로 화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인하트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쉬도록 하세요.
나인하트가 떠나자 방 안이 조용했다. 은월의 숨소리가 되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 했다. 오랜만에 밀려오는 행복감에 은월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수마가 다시끔 그의 위로 몰려들어왔다. 오랜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곤히 잠든 은월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노골적인 시선에 은월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은월을 향해 손을 뻗자 손 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붉은 눈을 가진 그가 이내 손을 거두곤 스파크가 튄 손가락을 매만졌다. 감히. 붉은 눈이 맹수처럼 빛났다.
"여기에요."
은월의 눈 앞에 서 있던 선원이 말했다. 아리안트에 도착했어요. 연합에 들어온지도 2주나 되었는데 이제서야 첫 순찰이었다. 처음 하는 순찰이 생각보다 훨씬 먼 곳으로 배정되어 아침 일찍부터 출발한 탓에 배를 타는 도중에도 쪽잠을 잤다. 연합에 들어온 이래로 찜찜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악몽은 꾸지 않았다. 아직 사제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인하트가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더 기다리면 될 터였다. 은월이 자신의 왼쪽 좌석에 내려두었던 짐을 한 어깨에 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쬐는 햇빛과 더운 바람이 그가 있는 장소가 아리안트임을 확실히 했다. 가방에서 마나엘릭서를 한 병 꺼내 목구멍으로 꿀떡 넘겼다. 아무리 맛있으라고 가게에서 설탕을 넣어줘도 역시 맛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약초로 만든 건데 맛있을리가. 은월이 아리안트에 발을 디뎠다. 발에 닫는 흙의 감촉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마을을 향해 한참을 걷다보니 짐을 지고 있는 어깨가 무거워졌다. 어차피 마을에 가는 길이고, 계속 짐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창고에 넣어둘까. 은월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창고에 100메소를 주고 짐을 한꺼번에 넣어두었다. 순찰을 마치고 연합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되찾아가면 될 듯 싶었다. 아. 창고를 나서기 전에 문득 든 생각에 은월이 창고에서 에레브 전용 이동스크롤은 하나 꺼냈다. 만약에 정말 죽기 직전이 되면 에레브에라도 이동해야했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은월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동주문서를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저기, 혹시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나요? 몬스터의 침입이라던가..."
은월이 마을을 나서 제대로 순찰을 들기 전 포탈 바로 옆쪽에 서 있던 주민에게 물었다.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꼼꼼히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물어본 것이었다.
"몬스터의 침입이요? 설마요. 아리안트는 대대로 용병을 고용해서 치안을 관리하던 마을인걸요. 사실은...부자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지만 부자들이 요새 자꾸 밖에 나돌아다니는 탓에 오히려 치안이 관리되고 있다고요. 몬스터의 침입이라던가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마세요. 돌 맞을거에요 당신."
질린 얼굴로 자신에게 대답하고선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은월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주민의 대답에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꼼꼼히 할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은월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찰을 나섰다.
순찰은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그냥 주변에 돌아다니는 흉폭한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위험한 부분은 기록해두고, 수리가 필요한 부분은 아리안트에게 전달해주는 일이 전부였다. 몬스터들도 생각보다 훨씬 온순해져서 너클을 휘두른 적도 손에 꼽았다. 2시간 정도 아리안트를 전부 돌아다니다 보니 예상시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나인하트가 5시 전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머쓱한 표정으로 은월이 뒷목을 매만졌다. 피딱지도 다 떨어져 새 살이 돋고 있었다. 은월이 뿌듯한 마음으로 마을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월이 마을에 돌아와 창고에서 물건을 찾으려 비밀번호를 말하자, 그와 동시에 저 멀리 항구 쪽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시그너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움찔, 몸을 굳힌 은월이 비밀번호를 말하다 말고 그에게 다가갔다.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오는 모습이 급하게 온 듯 싶었다. 은월이 얼굴을 굳히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기사단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에레브가 습격당했습니다. 나인하트님께서 당신을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주문서를 쓰면서 오기는 했는데 심각한 상황입니다. 어서 가시죠."
은월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은월이 군사에게 에레브 전용 이동주문서가 있냐고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이 먹먹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헤집었다. 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순찰을 돌기 전에 품 안에 넣어두었떤 이동주문서를 꺼내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한 번에 찢었다.
도착한 에레브의 풍경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반 년이었지만 그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른 다르모어의 수족일수도, 아니면 검은 마법사의 끄나풀일 수도 있었다. 에레브가 누군가에게 공격받은 것은 변하지 않았다. 연두빛 잔디로 가득하던 땅은 진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몬스터들과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연합군의 시체또한 매한가지였다. 은월이 보다 심각한 상황에 오른손에 쥐었던 너클을 바로 잡았다. 마치 전쟁 후의 뒷풍경 같았다. 안돼. 아직 끝나면 안돼. 아무것도 못했는데.
은월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침을 흘리며 역겨운 모습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끈적한 몬스터들을 너클로 베어내며 앞으로 이동해갔다. 너클에 베어지는 그들이 생생한 그 날의 몬스터들과 너무 똑같아서 아직도 검은 마법사가 살아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반면 신수가 근처에 있는 연합 회의장으로 가면 갈 수록 찜찜한 기분이 가중되었다. 바로 앞에 뭔가가 있었다. 중심부로 가면 갈 수록 몬스터들은 점점 많아져만 갔고, 넘실거리는 어두운 기척이 커져만 갔다. 하나 둘씩 해소되어가는 적들을 베어가면서 은월이 마침내 중심부에 도착했다. 무너진 사원이 눈에 띄었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까지 와서 여제나 나인하트나 그의 수족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은 살아 대피한 것 같았다. 한숨을 쉬고는 남아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너클로 베어내었다.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을 불빛 삼아 무너진 건물을 딛고 앞으로 전진했다.
"안녕."
은월의 뒤에서 나른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아닌가?"
은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 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넘실거리는 흑빛 머리칼이, 남색 하늘과 대비되었다. 그 달걀형 얼굴도, 앙 다문 얇은 입술도, 그 긴 로브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적색 눈빛만이, 검붉은 로브만이 변해있었다. 은월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은월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가 그런 은월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안녕, 이라고 말해줄래?
"...프리드."
은월이 입을 열어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혀로 굴려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은월은 애써 그런 자신을 무시했다. 이건 그가 아니야. 별개라고.
"그 이름은 별론데. 어쩔 수 없나? 그냥 그 이름으로 불러줘. 너만 다른 이름이라니 조금 치사하긴 하지만...이렇게 된 것도 그 사람이 짜 놓은 판의 일부겠지."
"그 사람?"
"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겠구나. 그럼...'위대하신 그 분' 이라고 해야 알아듣겠니?"
은월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알고싶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하던 사실이었다. 자신은 모른다며 시치미를 때던 사실이었다.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할 줄은 몰랐다. 은월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은월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 프리드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라니, 무슨 소리야?"
"왜...왜 에레브를 습격한거야? 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거야, 프리드. 제발..."
은월이 프리드를 향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원했다. 마치 눈물이 흐를 법한 모습에 프리드가 조소를 흘렸다. 눈물은 안흘리네. 여전히 독하구나. 그래, 그래야지. 프리드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왜, 난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단호한 프리드의 말에 은월이 입술을 짓씹곤 눈을 내리깔았다.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기대해왔던 마음이 처참히 부서지는 것 같았다. 무참하게 은월의 감정에 창을 내리꽂은 프리드가 여전히 재밌다는 얼굴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프리드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나른한 목소리가 더 이상 말하면 안될 것을 발음했다.
"사랑해."
은월의 동공이 크게 일렁였다. 아까까지 너클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이내 너클에서 완전히 떨어져 추락했다. 은월이 한참을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정말, 정말로 듣고 싶던 말이었다. 그런데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방향으로 듣게 되었다. 그 괴리감에 은월이 몸서리쳤다. 너가 없는 그 몇 백년동안 널 그렸는데 어째서 너는. 왜. 자신의 감정에 대한 배신감과 그럼에도 기뻐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모순이 은월을 뒤덮었다.
"너를."
"응, 말해."
한참을 머뭇거리던 은월이 끝끝내 말문을 열었다. 은월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너클을 다시끔 붙잡았다. 목소리에 결절이라도 온듯 먹먹하게 매었다. 은월이 침을 꿀떡 삼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았다.
"증오해."
은월이 끝끝내 숨을 삼키다 한꺼번에 내뱉으며 말했다. 숨소리가 섞여 비릿한 쇳소리로 들리는 그 한 마디 말은 잔뜩 가시를 품고 있었다. 둘 사이에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한 사람은 찢어져 가는 모습으로 목과 가슴께를 손으로 두드리며 방금 내뱉은 말을 곱씹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 그 후 프리드가 이내 비웃음을 내뱉었다.
"겨우 그거야?"
은월이 프리드의 말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프리드가 웃고 있었다. 은월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호흡곤란이라도 온 듯 온 몸이 덜덜 떨렸다. 프리드가 양 다리에 손을 올리고 기대 숨을 들이 마쉬고 내뱉는 은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소리없이 은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은월은 프리드가 저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너클을 쥔 손을 단단하게 주먹쥐었지만, 너클을 들어 그를 해칠 생각은 애초에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프리드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날 증오해?"
프리드가 샐쭉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은월의 바로 옆에 서서 말했다. 은월이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들어올려 프리드를 쳐다보았다. 명백한 증오와 독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프리드는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허리를 숙인 은월에게 자신 또한 허리를 숙여 귓속말했다. 은월의 귀에 나른한 미성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은월이 허리를 퍼뜩 떨었다.
"나는 널 잊은 적이 없어 은월."
그가 숨을 멈췄다. 그대로, 그 둘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그 곳엔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나인하트와 시그너스 여제가 침입이 잠잠해지고 다시 그 곳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저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그저, 시체만이.
신전이 황혼으로 물들었다. 신전의 가장, 가장 깊은 곳. 검은 마법사의 가장 친밀한 측근이 아닌 이상 도저히 알 수 없는 곳. 프리드와 은월은 그 곳으로 갔다. 온통 대리석으로 치장한 신전은 황혼의 빛을 바다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겨울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바깥의 풍경이 높은 고도에서 바라보니 별유풍경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신전의 분위기는 여전히 암울했다. 마치 광인들이 티타임을 가지듯, 긴 테이블에는 어질러진 것들로 가득했고, 유독 눈에 띄는 붉은색 커튼은 반쯤 뜯겨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는 그것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으므로.
은월은 프리드와 일 분 일 초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깊은 자안에는 벨벳 안대를 쓰고, 두 손은 단단한 족쇄로 속박되어 신전의 가장 두꺼운 기둥에 묶여 있었다. 은월이 프리드에게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프리드가 은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체의 일부가 닿아있지 않아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담배냄새나, 어렴풋이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로 프리드가 자신의 근처에 있음을 은월은 항상 확인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어림짐작할 수도 없었다. 가끔 손에서 족쇄를 빼주고 침대에 누워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 화장실은 언제든지 허락해주었다. 은월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더 이상 프리드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에게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클도 없는 상태에서 이 신전을 벗어나기는 무리라는 것을 은월도, 프리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는 가끔 그 벨벳 안대를 벗겨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너도 나랑 똑같은 붉은색이 된다면 정말 예쁠텐데."
프리드는 가끔 은월에게 이런 말을 짓껄이고는 했다. 은월은 아무 감흥도 나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프리드의 눈을 그저 멍하기 쳐다볼 뿐이었다. 인형같았다. 언젠가 유행했던 삼류 소설에서 봤던 완전한 인간인형. 아마도 변태 재벌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를 얻지 못해서 만들었었나. 너무 정교해서 사람과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했었지. 프리드가 별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은월을 쳐다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던 동공은 죽은 지 오래였다. 반면 은월은 자신에게 유독 집착하는 프리드가 사랑스러워 미치겠어도, 프리드가 증오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모순된 감정 속에서 여전한 것은 프리드 뿐이었다.
"사랑해."
프리드가 은월의 눈을 가리는 벨벳 안대를 벗겨내고는 그의 입술에 입맞추고 말했다. 은월이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나도."
은월이 굴복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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